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특별하게 기억나는 선물이 몇 개 있겠지만 오늘 백건우 선생님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연주는 기억에 남을 음악 선물입니다. 계절도 계절 중 최고의 때여서 여기저기 피어난 꽃과 새순들이 화려함을 드러냅니다. 무대에도 예쁜 꽃이 장식되었네요. 악기 배치는 저드 님 지휘 때와 다르게 고음현악기와 저음 현악기를 좌우로 배치했네요. 오늘의 하이라이트 백건우 선생님의 피아노협주곡 연주를 위해 프로그램도 맨 마지막으로 배치했군요. B열 어딘가에 앉아계실 사모님을 두리번거리며 찾아봅니다.

류명우 지휘자님이 등장하고 귀에 익숙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서곡이 경쾌하게 흘러나옵니다. 언제 들어도 밝고 생기 넘치는 모차르트 특유의 선율이 봄꽃송이처럼 팡팡 터집니다. 치밀한 박자는 각 파트 악기에 의해 드러나고 물결처럼 부드럽게 흐르며 반짝반짝 빛납니다. 한데 어우러진 소리들은 취할 순간도 없이 금방 끝나버립니다.

베토벤 교향곡 8번을 류명우 지휘자님이 소개를 해줍니다. 베토벤 자신의 6번 전원 교향곡과 비교하며 작은 F장조 교향곡이라고 했다고. 왜 자주 연주하지 않느냐고 물어봤더니 “다른 곡보다 월등히 좋기 때문이야”라고 했답니다. 베토벤의 곡들이 남성적이고 인간정신 승리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8번 교향곡은 쾌활하고 활기차고 중간 중간 따스한 느낌이 나는 교향곡이라고 소개해주었습니다.

1악장 빠르고 생기 있으며 활발하게 처럼 시작부터 생기발랄하게 시작합니다. 목관악기의 깔끔함에 현악기의 피치카토가 리듬을 맞추고 시원시원하게 긋는 첼로 선율, 숨겨둔 보석처럼 선율은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음원과 음반에 숨어있던 소리의 실체를 눈으로 보며 감상하는 이 즐거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현악기의 활과 금관악기의 금빛이 반짝반짝 빛나며 각 악기는 아름다운 선율을 쏟아냅니다. 2악장 빠르고 활기차게. 경쾌한 춤곡처럼 신나는 리듬이 뭔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처럼 이리저리 주고받는 선율이 재밌네요. 다시 한 번 소리의 실체가 주는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앙증맞게 핀 꽃송이처럼 예쁘고 화려합니다. 3악장 미뉴에트의 빠르기로. 넓고 확 트인 길을 달리는 시원함같이 선율은 바람에 펄럭이는 머플러처럼 음의 꼬리가 공중으로 날리며 경쾌합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게 뻗은 길을 여유롭게 달리는 편안한 기분입니다. 하늘에 둥실 뜬 흰구름처럼 바순은 선율 위로 불쑥 솟아오릅니다. 4악장 빠르고 생기있게. 등 뒤에 몰래 숨겨둔 소중한 선물을 불쑥 꺼내듯 모든 악기는 기교와 웅장함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베토벤 특유의 진격하는 힘찬 리듬. 그 속에 살짝 보이는 부드러운 선율이 함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첼로의 저 소리. 순간 휙 그으며 끊는 순간 울리는 소리는 일시에 허공을 가릅니다. 그리고는 끝을 향해 질주합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수 백 마리의 말무리 떼처럼 모든 악기가 어지럽게 내달립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피아노 백건우.

음악을 좋아하고 듣고 들으며 지내온 시간들을 생각하면 오늘은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세월이 흘렀어도 무대 위의 백건우 선생님을 보니 변함없이 정정하십니다. 첫 음, 숨죽이고 기대하던 그 첫 음. 거대한 소리의 실체가 숨죽인 가슴으로 깊고 둔중하게 뚜벅 뚜벅 걸어들어옵니다. 너무 과도한 타건은 소리의 파장이 넓어지면서 본래의 소리가 깨지는 경우도 있는데 기대한 딱 그 크기와 긴장감으로 객석에 전달됩니다. 첫 음만으로 오늘 연주를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쓸 수 없습니다. 한 음 한 음 모습과 표정,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지는 소리를 꼼짝하지 않고 주시합니다. 이렇게 듣는 즐거움과 몰입감을 주는 연주가 있을까요. 음악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 진정 건반 위의 구도자임을 다시 깨닫게 해줍니다. 온전히 음악에 몰입한 이 기분을 잊을 수 없겠네요. 1악장의 휘몰아치는 폭풍 같은 연주와 2악장의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숨막히게 아름다운 그 선율. 맑은 물방울처럼 튀는 피아노 소리. 좋은 연주는 왜 그렇게 금방 끝나버리는지 끝을 향해 달리는 피아노의 질주. 정말 대단하네요. 저절로 탄성이 쏟아집니다. 아 정말 대단하네요. 백건우 선생님의 이런 연주를 또 들을 수 있을까요? 정말 역사적인 현장에, 역사적인 연주를 들은 감격적인 순간이네요. 모두 일어나 마음에서 우러난 환호와 박수를 보냅니다. 몇 번의 답례. 앙코르 연주를 원하는 박수가 아니라 연주에 감동한 감격과 흐뭇함이 담긴 박수입니다. 앙코르 연주는 안 하셔도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충분합니다. 돌아오는 내내 연주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73세에 어떻게 이런 연주를 하실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건 뭐 73세에도 트리플 악셀을 완벽하게 해내신 겁니다. 대단하십니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