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어떤 시와 만난다.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문장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느 날 어떤 문장을 읽고 내가 기다려온 문장이 바로 이것임을 깨닫는다.’”신형철, [인생의 역사] 중

시는 음악과 한 형제이니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문장’을 음악으로 바꿔 들어도 될 것 같습니다. 늘 하던 대로 연주회가 있으면 미리 음악을 챙겨 듣습니다. 이번 연주처럼 처음 듣는 곡이 예고되면 새로운 친구를 사귀듯 천천히 여러 번 만나며 조금씩 알아갑니다. 차츰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뀌며 선율이 몸에 새겨지고 악기 소리가 들리며 곡 전체가 그려집니다. 모든 음악은 들을 때마다 놀랍습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어떻게 이런 곡을 작곡했을까? 어떻게 이렇게 연주할까? 매번 드는 생각입니다.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협주곡 제2번 사단조, 작품 63
연주회에서 주로 듣던 곡은 협주곡 1번이었는데, 바이올린협주곡 2번이 있었어? 하는 생각으로 찾아보니 “바이올린협주곡 1번이 20대의 혈기 왕성한 청년 시절의 작품이라면, 2번은 1935년 40대 중반 무렵의 작품으로서 약 20년의 간격이 있어 뚜렷한 색다른 느낌을 맛볼 수 있다.”는 글을 읽고 유튜브에 검색해보니 몇 개의 영상이 있었습니다. 재닌 얀샌과 게르기예프 지휘와 레오니다스 카바코스의 연주, 심포니 송과 함께 함신익 지휘와 송지원의 바이올린 연주, 2018년 11월 2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KBS 교향악단 제736회 정기 연주회에서 요엘 레비의 지휘와 스테판 피 재키브의 바이올린 연주 영상도 있었습니다. 스테판 피 재키브가 누구인가요? 금아 피천득 선생님의 외손자 아닙니까. 음악은 또 이렇게 여러 사람과 연결됩니다. 연주 시간은 27분 정도니까 출퇴근하는 차 안에서 들으면 딱 맞는 시간으로 아침에 한번 오후에 한번 그렇게 듣다보니 음악이 귀에 익숙해졌습니다.
연주회가 점점 다가오면 그동안 들으며 기대하던 음악을 만날 생각에 마음이 설렙니다. 첫 악장의 깊은 바이올린 소리에서부터 엄청난 속도로 오르내리는 활과 매끄럽게 긋는 서정적인 연주와 스타카토로 현을 퉁기는 명랑함을 기대하며 갑자기 추워진 초겨울 날씨를 뚫고 연주회장으로 갑니다.

이제 저드 님이 안 계시니 섭섭합니다. 객원지휘로 크리스토프 쾨니히 님이 지휘합니다. 젊고 핸섬하며 날렵한 인상입니다. 지휘도 열정적이고 감성이 풍부하며 화려합니다. 솔리스트 연주자를 악장으로 가지고 있는 대전시향. 김필균 폴이 예의 그 어슬렁거리는 발걸음으로 등장합니다. 오래도록 그의 연주를 봐온 관객의 눈으로 본 그의 연주는 믿음직하고 세련되며 날카롭고 예리합니다. 얼마나 많이 연습하고 또 연습했을까요. 곡 하나하나를 아껴 들었습니다. 그동안 듣던 음악이 김필균 님의 바이올린을 통해 하나 하나 흘러나옵니다. 아름다운 선율에 취해 눈을 감고 온 마음으로 음악을 감상합니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깊고 웅장하게 때로는 날카롭고 예리하게 바이올린은 마음을 울립니다. 좋은 연주는 항상 아깝고 시간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마지막 3악장 엄청난 속주와 함께 끝나버리니 순식간에 다 먹어버린 달콤함에 입맛을 다시듯 허무하게 무대를 쳐다봅니다. 여기 저기서 브라보를 외치고 함성이 쏟아져나오고 소나기 소리 같은 박수가 공연장을 가득 채웁니다. 힘껏 치는 박수에는 감동의 마음과 감격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도 빼어난 연주였습니다. 차이코프스키 특유의 서정이 첫 악장에서 드러납니다. 맑은 슬픔. 아름다운 우울함. 모순된 감정들이 하나로 합쳐져 때로는 부숴내듯 뿜어내고 두드리고 터뜨리는 음의 덩어리들이 연주회장을 가득 채웁니다. 하나 하나 한 악장 한 악장 받은 감동을 연주자 한 분 한 분을 만나 악수하며 수고하셨다고 정말 연주 너무 좋았다고, 감사하다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기쁨의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저녁노을처럼 퍼지던 후이 리 님의 호른 소리, 이진아 님의 깊고 맑은 클라리넷 소리, 언제나 최고의 소리를 들려주는 홍수은 님의 오보에 소리, 김진훈 님의 바순 소리,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의 웅장함은 금관악기의 금빛 연주가 없이는 불가능하죠. 모든 악기의 음을 모두 끄집어내야만 할 것 같은 크고 깊은 음악의 덩어리를 듣는 희열을 느낍니다. 연주하신 모든 분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음악으로 받은 감동은 새벽까지 이어져 포르투갈을 상대로 전반전에 이강인이 올린 골이 호날두의 등에 맞고 떨어진 공을 김영권이 동점골로 만든 순간 자리에서 튀어 오르며 흥분하고 후반 45분 손흥민의 80미터 질주에 이어 수비수 다리 사이로 패스한 골을 황희찬이 역전골로 성공시키는 새벽 그 순간에는 미친 함성을 지르게 만들었습니다. 하하하 대한민국 축구가 또 이렇게 사람을 미치게 만듭니다. 우르과이와 가나의 9시간 같은 9분의 추가 시간을 가슴졸이며 후련한 함성을 지릅니다. "와!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