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협주곡 라장조, 작품 35

얼마나 듣고 또 듣던 음악인가요. 그리고 또 얼마나 듣고 싶은 연주인가요.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협주곡.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고 듣던 음악. 그의 슬픈 사연. 폰 메크 부인과의 이야기. 음악은 사연을 가지고 있어 슬프게 빛납니다. 이번 연주의 바이올린 협연자 콜랴 블라허. 팜플렛에 있는 그의 프로필과 연주경력을 보며 얼마나 잘 연주해 줄까 전혀 의심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처음 서주부분 바이올린 솔로를 불러내려고 휘몰아치는 오케스트라 총주 후 곧바로 이어지는 바이올린 솔로. 고요한 적막을 깨고 1730년 산 과르네리 델 제수의 바이올린 소리가 허공으로 흘러나옵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협주곡의 바이올린은 우뚝 서고 당당합니다. 바이올린 하나로 오케스트라와 관객을 압도하는 힘이 있습니다. 활이 현을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시원하게 그으며 내는 소리에 빨려듭니다. 활과 현이 만나 날카롭게 뽑아 올리고 낮게 깔리는 소리는 분명하고 예리합니다. 초연 당시 왜 “연주 불가능한 작품”이라고 했는지 짐작이 가는 기교와 빠르기를 제어하는 힘이 심장을 뛰게 합니다. 이미 심장에 입력된 바이올린 선율은 무대에서 연주하는 소리와 일치되며 저절로 눈을 감게 하고 소름 돋게 합니다. 단순히 아는 음악이라 반가운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느끼게 해주어 좋은 음악입니다. 산 정상에 오른 사람의 당당함과 기분 좋은 숨소리를 듣는 듯 무대에서 강렬한 연주 후 잠깐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때 서있는 연주자의 모습이 멋있습니다. 숨을 고르고 오케스트라가 닦아놓은 음의 주단 위를 바이올린은 환한 소리의 빛으로 걸어갑니다. 바이올린은 속삭이듯 다가오기도 하고 뚜벅뚜벅 걸어오기도 하고 세찬 바람처럼 불어오기도 하며 음악을 몰고 다닙니다.

카덴자. 고요함 속에 예리하게 긋고 퉁기고 켜는 소리는 울림통을 거쳐 소리의 파문을 일으키고 찌르는 소리의 끝과 맑은 쇳소리처럼 들리기도 하며 끌어올려 켜는 소리에 몸도 따라 올라갑니다. 소리에 사로잡힘. 싸이렌의 유혹은 이렇듯 치명적입니다. 헤어나올 수 없는 음의 올가미에 사로잡혀 꼼짝할 수 없습니다. 솔리스트 콜랴 블라허는 얼마나 많이 이 곡을 연주했을까요. 연주 불가를 가능하게 한 그의 연주에 매료됩니다. 바이올린의 압도적인 사로잡음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바이올린 선율이 꽉 붙잡고 끌어올렸다 휘감고 흔드는 소용돌이에 빠져 황홀한 어지러움을 느낍니다. 현이 활의 마찰을 견디는 것이 놀랍습니다. 켜고 긋고 퉁기는 소리에도 바이올린은 끄떡하지 않고 질주, 속주합니다. 1악장의 클라이막스로 활은 치켜 올라갑니다.

2악장 칸초네타 형식으로 조금 느리게. 1악장의 정열은 2악장의 느림과 분명히 대비됩니다. 오보에 소리에 언 듯 언 듯 들리는 바순도 묘미입니다. 2악장의 이 애절한 선율. 아! 탄식하게 됩니다. 두 손을 털썩 늘어뜨리고 숨을 아래로 내쉬고 고요히 듣습니다. 빛나는 플루트 소리 후 바이올린은 더 아름답고 비통합니다. 손댈 수 없는, 손대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눈물 덩어리 같아 그냥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게 되는 슬픈 선율입니다. 차이코프스키만의 선율. 아름다움 속에 묻어있는 맑은 눈물을 보는 듯합니다. 쿠즈네초프가 그린 <차이코프스키의 초상>의 그 눈빛을 생각합니다. 차이코프스키만이 아는 슬픔의 실체. 참았던 눈물이 터지듯 3악장으로 이어지며 아주 빠르고 생기 있게 곡은 살아납니다. 3악장 첫 부분의 독주도 너무 멋있습니다. 자꾸만 끝을 향해가는 협주곡이 아쉬울 뿐입니다. 빠르기는 정확히 제어되지 않으면 지저분한데 정교한 음의 마디마디가 꼭 맞는 소리들로 채워지고 이어지며 듣는 기분을 최고조로 만듭니다. 탁한 듯 굵게 긋는 바이올린 저음은 점점 급해지며 오케스트라와 합해집니다. 흙먼지를 뒤로한 채 끝까지 앞서서 달리며 빠르기는 최고조에 이릅니다. 작심한 듯 고쳐 쥔 활은 끝을 향해 바이올린을 채찍질합니다. 살짝 짚은 현을 그으며 내는 소리의 독특함. 바순 클라리넷과 주고받다 되찾은 바이올린의 주도로 높이 찌르고 저음으로 깊이 울립니다. 바람을 불어넣어 불꽃을 더 크게 만들 듯 오케스트라가 지핀 화려한 불같은 소리를 바이올린이 받아 최후의 끝으로 쏘아 올립니다. 이 미친 소리를 어떻게 글로 잡아놓을 수 있겠습니까.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끌어올린 것처럼 벌떡 일어나 브라보를 외칩니다. 일제히 외치는 함성은 끝까지 달려온 바이올린의 열정에 대한 환호와 답례입니다. 연주 후의 이 흔쾌한 박수. 몇 번의 브라보 외침.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 그를 향한 감사와 감격의 마음은 아트홀로 가득 차고 넘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