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이름, 대전!”

이틀 동안 내린 봄비에 씻긴 나무와 꽃은 세수한 어린아이처럼 맑고 깨끗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언뜻언뜻 보이는 벚꽃 싸리꽃과 노란 개나리 펑펑 터진 하얀 목련과 홍목련. 봄은 어김없이 아름다운 꽃들을 피워냈습니다. 꽃을 보니 마음도 화사해집니다. 대전문화예술의전당도 봄빛으로 가득합니다.

어제 교향악 축제를 다녀온 시향의 연주를 듣습니다. 기대하고 기다리던 연주. 의미 있는 건 대전출신 작곡가 안성혁 씨의 곡 교향시 [태초의 빛]을 연주한다는 것입니다. 새롭고 생소한 곡을 대할 때의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팀파니의 터질 듯한 소리로 음악을 엽니다. 모든 악기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함께 들려오는 종소리. 태초의 혼돈이 모든 악기로 표현됩니다. 엇박의 클라리넷 소리가 새소리처럼 들리고 긴장된 현악기 소리와 작은북의 트레몰로. 호른과 튜바는 붕붕 저음을 울리고 다시 터지는 소리에 트럼펫이 음 사이를 뚫고 나옵니다. 종소리와 팀파니 소리가 주고받으며 이내 찾은 평화로움을 호른과 트럼펫이 알립니다. 여전히 긴장된 현악기 소리는 점점 본래의 맑은 소리를 찾았지만 반복적으로 들리는 타악기 소리가 무언가 일어날 듯 긴장된 소리를 들려줍니다. 뭔가 알 수 없는 날것의 웅장함과 새로움이 곡을 궁금하게 하고 소리에 빠져들게 합니다. 세 번째 터진 큰 소리. 탐탐의 울림소리가 깨질 듯 터지고 오르간 소리 같은 소리가 찌르며 고조된 상태에서 음악은 끝을 맺습니다.

박수를 받으며 작곡자 안성혁 씨가 무대 위로 올라와 인사합니다. 그의 표정에 감사와 감격이 묻어 있습니다.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는 대전 시향과 지휘자 저드님 그리고 관객 앞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제5번 내림마장조, 작품 73 “황제”

피아노가 무대 중앙으로 옮겨지고 자리를 잡습니다. 피아노 건반이 보이는 자리에서 곡을 감상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피아니스트 손정범 씨가 박수를 받으며 등장합니다. 예전에 FM 클래식 아침 방송 시그널 음악으로 들리던 때가 있었는데 웅장한 오케스트라 화음을 현장에서 듣는 기분이 감회가 새롭습니다. 호른과 주고받는 현악기의 날렵한 소리. 바이올린이 무대 앞 양 옆에 배치되어서 그런지 그 소리가 분명하고 깨끗하게 들립니다. 한참을 기다린 피아노가 오른손으로 받아 물 위에 파문을 일으키듯 한 음 한 음 짚으며 꼭 맞는 그 소리는 물방울처럼 튀기도 하고 종소리처럼 울리기도 하며 피아노만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몰입한 몸짓과 표정, 손놀림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소리로 보이는 음악을 감상합니다. 다시 받은 오케스트라 총주. 어제 교향악 축제 연주 후라 그런지 마음껏 시원시원하게 연주하는 듯합니다. 황제의 면모를 어김없이 보여주는 힘차고 화려한 연주입니다. 피아노와 조화를 이룬 소리들은 하나도 흐트러짐 없고 서로의 길을 가지만 하나로 이루는 커다란 음의 덩어리를 만듭니다. 휘몰아친 후 고요함도 아름답네요. 피아노가 앞서가며 남긴 소리의 발자국을 오케스트라가 뒤따르며 크고 웅장한 황제의 음악을 펼쳐 보입니다. 카덴자. 숨죽이고 피아노 위를 오르내리는 연주자의 손에 집중합니다. 피아노는 감춰둔 보석을 쏟아내듯, 아름다운 향기를 뿜어내듯 아름답고 영롱한 소리의 구슬이 객석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1악장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마음껏 뽐내며 두드리고 켜고 터치고 퉁기며 최고조를 향해 질주합니다.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의 손은 놀랍고도 위대하군요. 손가락 하나하나가 짚고, 누르고, 때리는 소리에 사로잡혀 꼼짝도 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이미 각인된 수많은 연주와 현장의 연주가 일치되며 흐뭇함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2악장. 세상의 아름다움을 2악장에 모아놓은 듯 저절로 숨죽이고 아름다운 선율에 심취합니다. 연주전부터 감동할 준비를 하고 있다 맞이하는 아름다운 선율. 아! 아름다움은 이렇게 애절하고 슬프게 아름다운 것인가요. 어제 본 영화 [자전거 탄 소년]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시릴의 그 애처로운 눈빛과 사만다의 따뜻한 사랑이 음악으로 표현되어 오래도록 남을 영화였습니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흘러나오던 황제 2악장은 절묘했습니다. 기절했다 툭 털고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시릴의 뒷모습과 2악장은 소년의 빨간 티셔츠처럼 붉게 스며들었습니다. 음악은 영화로, 눈물로, 감동으로 젖어들게 합니다. 알프레드 브렌델, 엘렌 그리모, 김선욱, 조성진이 오버랩 되면서 2악장을 눈물고인 눈망울로 바라보며 듣습니다. 쉬지 않고 바로 3악장으로 연결된 소리는 다시 황제의 위엄을 되찾아 허리를 곧게 펴고 오른손에 홀을 쥐고 우뚝 섭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을 떠올립니다. 모름지기 황제는 이래야할 것 같은 거대한 아우라를 음악은 드러냅니다. 솔리스트 손정범의 황제 연주는 어떤 황제 연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멋진 연주였습니다. 시향과의 조화도 완벽했고 그냥 실황음악으로 남겨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지막 총주를 속으로 따라 흥얼거리며 지나온 악장을 아쉬워합니다. 이렇게 좋은 연주는 늘 아깝고 아쉽습니다. 한음 한음이, 한 악장 한 악장이 지나는 것이 아깝고 아쉽습니다. 봄비에 떨어진 벚꽃을 바라보며 아쉬워하듯 화려한 순간은 영원히 잡아놓고 싶은 심정입니다.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이 좋은 계절에 최고의 연주를 들려준 시향과 피아니스트 손정범 씨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대전 출신으로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뮌헨 ARD 국제 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한국인 최초 1위를 수상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손정범.” ‘슈퍼 루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곧바로 들려준 앙코르 곡 쇼팽의 [대양]. 피아노는 큰 바다를 품고 있었군요. 건반은 큰 파도가 되어 일렁거리고 그 위를 헤엄치듯 오르내리는 손가락. 영화 [그랑블루]에서 자크가 누운 방에 천장에서부터 차오르는 바다처럼 온몸을 음악의 바다에 빠지게 하네요. 우리는 대양에 흠뻑 젖은 몸으로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