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선물”

사랑하는 사람을 놀라게 하려고 몰래 선물을 준비할 때는 가슴이 설렙니다. 그 사람이 선물을 받고 놀라며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는 즐거움. 그래서 깜짝 선물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에게 행복한 선물입니다.

리게티의 [론타노]가 그런 깜짝 선물이 아닐까요? 보통 본 연주의 서브 연주로 생각되는 서곡연주에 그치지 않고 한 곡 한 곡 세심한 준비와 새로운 연주에 도전하는 시도에 감동합니다. 음악은 정말 다양합니다. 각자 자신의 취향대로 자신의 음악을 즐기는 현대인에게 리게티의 음악은 새로운 흥분과 묘미를 줍니다. 음악은 단지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드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긴장, 날카로운 모호함, 불안과 방황도 표현해서 다채로운 느낌을 줍니다.

늘 먹던 음식만 먹다가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는 것처럼 세상에는 다양한 음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음악에 대해 갖고 있던 기존의 생각을 뒤엎는 독특한 음향. 자꾸 이게 뭔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기승전결의 구조를 생각하며 이해하려고 하던 생각을 버리고 그저 음향의 변화를 느껴봅니다. 얼굴을 스치는 바닷바람 같은 느낌. 나뭇가지 사이로 흐르는 바람의 움직임 같기도 하고 매미나 잠자리의 날갯짓 소리 같기도 하며 그런 사이사이 으르렁거리는 어떤 소리의 덩어리와 금속성의 뾰족함과 날카로움이 귀를 쫑긋 세우게 합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셔터 아일랜드]에 사용됐다고 해서 주의 깊게 영화를 다시 봤습니다. 셔터 아일랜드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거친 바위에 둘러싸여 스스로 외부와의 접촉을 거부하는 음산하고 암울한 고립의 섬인데 여기에 흉악범을 수용하는 정신 병동이 있고, 거기서 의문의 실종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테디 다니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잇달아 일어납니다. 그 후 영화는 과거 속에 갇혀 있는 앤드류의 무의식을 집요하게 파고드는데 죽음, 살인, 폭력, 전쟁, 환각, 악몽의 기억이 난무하는 그의 의식 세계를 현실과 허구,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몽타주처럼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진실을 밝히는 것을 유보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스릴과 서스펜스를 만끽하도록 한 영화였습니다.

연주 전 무대를 보니 오케스트라의 배치가 종전과 다르네요. 바이올린을 양쪽으로 배치하고 첼로와 비올라를 안쪽에 두었고 호른은 기존과 반대 위치에 팀파니와 큰북 타악기는 왼쪽에 더블베이스는 맨 뒤에 있습니다. 리게티의 음악을 위한 배치인 듯합니다.

박수를 받으며 저드 님이 등장하고 마이크를 잡고 무대를 바라봅니다. 최정원 첼로 부수석이 곁에서 통역을 하며 오늘 연주할 리게티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50여 년 전에 작곡했고 여러 영화에 사용되었다고. 조용하게 시작해서 조용하게 끝나는 음악인데 규칙적인 호흡이 없지만 4박자를 지휘할 뿐이라고. 낯설겠지만 귀를 열고 들어달라고 이야기하는 지휘자의 특별한 작품 해설은 아마도 대전 초연 작품인 리게티의 론타노를 듣는 청중들에게 곡에 대한 사전 정보를 주기위한 세심한 배려입니다. 플루트와 클라리넷의 단선음이 지속되다가 오보에가 색을 입히고 점점 악기가 개입되면서 독특한 음향을 만듭니다. 전자음 같은 스산한 소리는 바이올린 파트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활이 만들어내는 소리로 마이크 소리가 하울링 될 때 나는 소리처럼 귓가를 울리는 진폭으로 느껴집니다. 오디오로 듣던 소리의 실체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악기 소리로 만납니다. 모든 악기의 소리 끝은 날카롭습니다. 곤충들이 일제히 날개를 비벼대는 듯한 소리는 마찰된 소리 같기도 하고 고공비행하는 비행기 소리 같기도 하고 깊은 해저의 둔중한 음향 같기도 하고 그 위로 금관악기의 독특한 음색이 입혀지며 신비로움은 극에 달합니다. 기존과 다른 색다른 음악을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마르셀 뒤샹이 남성용 변기를 전시하고 [샘]이라고 명명하여 미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 것처럼,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대할 때 느끼는 인식의 전환이나 애니쉬 카푸어의 [리바이어던]을 보는 것처럼 은밀한 두려움과 호기심, 낯선 것에 대한 심리적 동요 같은 불안 의식을 음악이 느끼게 해줍니다. 새롭고 신선하고 독특한 음악적 경험이었습니다.

드보르자크, 첼로협주곡 나단조, 작품 104

키가 190은 되어 보이는 오늘의 협연자 첼리스트 이슈트반 바르다이가 등장합니다. 그에게 첼로는 작은 악기처럼 보입니다. 1악장 서주 부분은 언제 들어도 웅장하고 멋집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음악을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지휘자가 되어 허공에 손을 흔들어 본 적이 있을 텐데요. 앞쪽 A석에 앉아 기존의 자리가 아닌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호른 소리를 듣습니다. 뒤에서 몰려오는 거대한 음의 파도에 올라타고 첼리스트가 힘차게 활을 긋습니다. 소리는 분명하고 힘이 있으며 자신감이 넘칩니다. 유연하게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음의 파도 위를 미끄러지며 헤치고 나갑니다. 듣고 또 들어 각인된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소리와 겹치며 흐뭇한 마음으로 감동합니다. 무대 전면에서 첼로는 꼿꼿하고 당당하며 기세등등합니다. 모든 악기가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화음을 연주할 때는 전율하며 감동합니다. 온몸으로 첼로를 감싸 안고 손끝으로 짚고 활로 켜며 최상의 소리를 뽑아냅니다. 오케스트라와 첼로의 호흡도 말끔해서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습니다. 꽉 잡아놓은 소리의 힘에 객석은 압도됩니다.

2악장 느리지만 지나치지 않게. 클라리넷과 잉글리시 호른이 열고 아주 아름답고 서정적인 첼로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손끝으로 지판을 짚고 흔들며 활로 켜는 소리의 떨림. 첼로 특유의 깊고 깊은 울림이 가슴으로 파고 들어옵니다. 처연한 듯 애잔한 듯하고 유장하고 웅장하기도 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꽉 잡고 놓아주질 않습니다. 가끔씩 어울리는 클라리넷, 플루트, 오보에 소리의 감칠맛! 네 대의 호른 소리도 흐트러짐이 없네요. 그리고 이어지는 첼로 카덴자. 플루트와의 이중주를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음악이 만들어내는 감동은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느림이 주는 푸근함과 고요함 부드러움이 2악장에서 쏟아집니다. 아름다움은 늘 아쉽습니다. 연주에 몰입하며 듣다보니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2악장이 끝나버립니다.

3악장 보통 빠르기로. 다시 찾은 웅장함의 활기. 트라이앵글의 맑은 울림이 거대한 소리 속에서 들립니다. 치고 나가는 첼로 소리. 따라오라고, 함께 가자고 재촉하듯 앞에서 우뚝 섭니다. 정말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은 아무나 연주할 수 없을 듯합니다. 힘!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객석을 압도하는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해보입니다. 가만히 사진의 드보르작을 보니 고집과 뚝심이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고집 세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드보르작의 음악 특유의 힘을 느낍니다. 끝을 향해 달리는 소리들. 거친 호흡을 첼로 소리로 느낍니다. 맨 끝 가장 높은 음의 트레몰로 소리 후 고요해진 객석. 그리고는 가장 웅장한 피날레를 퍼붓습니다.

브라보! 누구라도 브라보를 외칠 연주입니다. 객석의 환호와 박수에는 좋은 연주에 감동한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그 마음에 기꺼이 화답하는 앙코르. 혹시나 하는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바흐의 무반주첼로모음곡 1번 프렐류드를 연주합니다. 마음속으로 지르는 탄성. 또 한 번 첼로는 객석을 사로잡습니다. 이슈트반 바르다이가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첼로모음곡은 그의 비주얼과 겹치면서 훨씬 훤칠하고 담백하게 들리는군요. 잘 생기고 키도 크고 연주도 잘하니 더 멋지게 보입니다.

박수는 두 번째 앙코르를 조릅니다. 독특한 기교를 뽐내는 처음 듣는 곡인데 뒤에 앉은 이송희 악장은 이 곡을 아는 듯 살짝살짝 고개를 움직이며 소리를 따라 연주를 듣네요.(연주 후 시향 홈페이지에서 보니 두 번째 앙코르 곡은 피아티, <솔로 첼로를 위한 12개의 카프리스, 작품25> 중 제3번. 보통빠르기로 라고 공지되어 있네요.) 땡큐! 땡큐입니다. 이런 멋쟁이를 봤나!

기존의 오케스트라 배치로 A석에서 들을 때는 바이올린 파트가 왼쪽에 있어서 소리의 균형을 느낄 수 없었는데 오늘 배치는 왼쪽에 앉아 들어도 전혀 거슬리지 않아 참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