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놀랍고 신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양탄자라든지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의 열려라 참깨! 소리에 금은보화가 가득한 보물창고가 열리고 금을 달기 위해 저울을 빌려왔는데 저울에 금붙이가 붙어왔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신비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중 디즈니 만화영화로도 나와서 그 영상이 남아있는 알라딘의 마술램프와 지니. 램프를 문지르면 램프의 요정이 스르륵 연기처럼 나타나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뭐든 시키시면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들을 현실로 이루어주는 그런 행복한 상상.

그런데 인터넷으로 세계가 연결되고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요즘 시대에는 아라비안나이트 보다 더한 일들도 현실에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클래식 공연을 실황으로 들어보는 것이 귀한 시절 FM 라디오에 귀 기울이며 듣고 라이선스 LP 음반도 귀해서 빽판으로 듣던 음악들. 이제는 그 지직거리는 잡음 소리가 오히려 희귀한 가치를 지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까만 음반을 비스듬히 들고 세정 스프레이를 뿌려 부드러운 융으로 살살 닦아 턴테이블에 올리고 돌아가는 음반 위에 카트리지를 신중하게 내리던 그 순간이 생각납니다. 음악은 이렇게 정성 드려 들어야 했고 그것만으로도 음악은 축복처럼 부드럽고 아름답게 흘러나왔습니다.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지게 듣던 음악들. 어쩌다가 테이프가 롤에 끼어 잡아 뺐을 때 실타래처럼 풀려 나오던 막막함. 90년대 CD는 무지갯빛 광채를 띠고 도도하고 세련되게 잡음 없이 음악을 들려주더니 MP3로 늘어지지도 않고 한 트랙이나 전 악장을 무한 반복해서 들려줍니다. 어쩌다 비디오테이프로 음악 실황을 흐릿하고 불투명한 화면으로나마 보고들어도 마치 살아있는 음악을 보는 것 같았고 혹시라도 KBS에서 실황음악을 중계해주면 공비디오테이프를 넣고 빨간 녹화 버튼을 눌러 담아놓고 라벨에 매직으로 써 놓고 흐뭇해했습니다. 그러다 DVD를 만나 얇은 플라스틱을 탁 열어 가운데 동그라미를 꾹 눌러 DVD 음반을 꺼내 슬라이딩에 쓱 넣으면 트랙 별로 탐색하고 정지하거나 되돌려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는 음악은 충성스런 하인처럼 플레이 버튼만으로 언제든 불러낼 수 있는 램프 속 음악이었습니다.

Youtube는 또 다른 램프의 요정입니다. 폴리니, 소콜로프, 부흐빈더, 반 클라이번, 아쉬케나지, 엠마뉴엘 엑스가 내 앞에 불려나와 브람스 피아노협주곡을 연주합니다. 세계 최고의 교향악단이 최상의 연주를 들려줍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알라딘의 마술램프를 문질러 명연주자들을 불러내도 그들은 살아있는 음악을 연주하지 못합니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톰 크루즈가 죽은 아들이 그리워 보고 싶을 때마다 홀로그램으로 불러들인 영상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처럼 불러들인 영상은 영상일 뿐 단 한번 뿐인 현장의 음악을 듣기 위해, 살아있는 현재의 음악을 듣기 위해 연주회장으로 갑니다.

가을이 오면 브람스를 떠올립니다. 온통 붉게 물든 계절의 아름다움은 브람스의 음악과 함께 낙엽처럼 물들고 바람에 흔들립니다. 오늘은 어떤 연주를 들려줄까 기대하며 기다리는 마음에 늘 가슴은 설렙니다. 팜플렛을 보니 연주곡의 배치가 종전과 다르네요. 보통 협주곡을 먼저 교향곡을 나중에 연주하는데 오늘은 협주곡을 나중에 연주하는 것을 보니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에 대한 비중을 더 준 것으로 보이네요. 브람스 곡에서 호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데 연주자들을 보니 호른 객원 연주자 파블 잘 씨가 왔네요. 그 외에도 플루트 클라리넷 트롬본 튜바 타악기 연주자를 객원으로 모셨네요.

브람스 대학축전 서곡, 작품 80

대학축전 서곡 시작부터 들리는 호른 소리는 참 좋네요. 왼쪽 바이올린 파트와 오른쪽 첼로 파트의 소리의 조화가 아름답고 금관악기의 맑고 깨끗한 소리가 가슴을 시원하게 해줍니다. 익숙한 찬송가 [즐겁게 안식할 날] 곡조가 트럼펫으로 객석에 울려 퍼집니다. 합주는 깔끔하고 명확하며 섬세하게 들립니다. 종전의 서곡과는 다른, 서곡이 주는 짧고 강렬한 임펙트가 잘 드러났습니다. 단원들의 연주에 대한 몰입도가 진지해 보이고 지휘자 저드 님과 음악적으로 긴밀히 연결된 느낌이 전해집니다. 소리는 서로의 마음으로 연결되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꽉 잡고 긴장하게 하며 잠시도 가만히 놔두지 않는 장악력을 가졌습니다. 바이올린 파트의 깔끔한 선율은 일사불란한 활의 움직임으로 드러나고, 트라이앵글의 트레몰로 심벌즈의 금속음, 목관악기의 청아한 음색, 깊고 풍성한 첼로 파트. 모든 악기는 서로 어울려 곡이 들려주고자 하는 최상의 소리를 드러냅니다. 아~ 오늘도 감동의 연주를 예감합니다.

브람스 교향곡 제3번 바장조, 작품 90

1악장 빠르고 활기차게-조금 느리게 끌듯이. 첫소리만으로도 아! 끝났구나! 알 수 있는 3번 교향곡의 첫인상을 좋게 보여줍니다. 브람스 특유의 선율이 가슴으로 밀려들어옵니다. 클라리넷의 맑고 점잖은 소리에 비올라가 받고 오보에가 플루트와 함께 바이올린으로 넘겨줍니다. 붉은 낙엽을 우수수 쏟아내듯 바이올린 소리는 일제히 음들을 털어낼 때마다 1악장 주선율이 아름답게 퍼집니다. 붙잡아두고 싶은 아름다운 선율. 날씨 좋은 날 사방의 모든 경치가 아름다워 어디를 찍어도 다 멋진 사진이 되는 것처럼 각 파트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어울리며 하나 되었다가 흩어지고 솟구쳐 오르고 가만히 가라앉으며 1악장은 연주됩니다.

호른 등장! 이 소리만이 꼭 필요해서 객원 주자를 모셔왔겠지요. 울렁울렁 음들은 큰 파도가 되어 솟아올라 넘치면 소리의 파도를 타는 마음은 함께 울렁거립니다. 매번 연주 때마다 기대치를 높여놓고 감동시키고 흐뭇하게 만드는군요. 저드 님의 지휘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하나도 흐트러짐 없이 명확하고 깔끔하게 곡을 연주하네요. 아~ 1악장이 끝났다! 이 좋은 아쉬움이란!

2악장 조금 느리게. 클라리넷이 2악장을 열면 첼로와 비올라가 대답하며 두 파트는 다정하게 대화합니다. 점차 넓어진 음들은 모래사장을 간질이는 흰 파도처럼 음의 해안가를 찰싹거립니다. 멀리 수평선에 떠있는 배처럼 목관악기는 바이올린 선율위에 둥실 떠있습니다. 잔잔한 수면 위의 햇살처럼 소리들은 부드럽게 반짝이며 빛납니다. 단원들의 눈빛은 지휘자를 향하고 약간 앞으로 숙인 자세가 연주의 몰입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2악장 끝 피아니시모까지 감동을 주는군요.

3악장 조금 빠르게.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의 선율. 너무나 아름다운 이 선율에 마음을 빼앗긴 시간들이 생각나며 가슴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영화 장면이 겹치고 소설이 떠오르고 첼로 선율을 들으며 눈감고 속으로 따라 부릅니다. 영원히 잊히지 않는 곡조. 브람스의 자유롭지만 고독한 영혼에 공감하는 선율입니다.

일요일. 자리에서 일어난 폴은 문아래 편지가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과거에는 ‘푸른 쪽지’라고 시적으로 표현했던 속달우편으로, 그녀는 실제로도 그 편지가 시적으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맑은 11월의 하늘에 다시 나타난 태양이 그 순간 그녀의 방을 따뜻한 빛과 음영으로 채웠던 것이다.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분명 그 후에도 그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대답 같은 걸 한 적은 없었다.-[브람스를 좋아하세요.]프랑수아즈 사강, 민음사. P.56

영화에서는 폴(잉그리드 버그만)이 필립(안소니 퍼킨스)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편지를 받고 “내가 만나러 가는 것은 필립이 아니라 음악이야. 오늘 오후에 가 봐서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면 어쩌면 매주 일요일마다 갈지도 모르지. 그건 혼자 사는 여자에게 좋은 소일거리야.” 이렇게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이야기 합니다. 브람스 교향곡 3번 하면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와 영화 [Goodbye Again]을 연결 짓는 공식은 식상하게 여길 수도 있지만 단일 메뉴로 그 맛에 각인된 중독적인 맛집의 유혹처럼 음악은 소설과 영화로 영원히 잊히지 않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묶여 있습니다.

4악장 빠르게-조금 느리게 끌 듯이. 언제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지만 오늘따라 바이올린 파트의 연주는 참 말로 표현할 수 없게 좋네요. 온몸을 전율하게 끝까지 끌어올려 뽑아내는군요. 트럼본 소리도 좋은데요. 객원주자 바르토미 카롤 비텍 씨. 저번에도 왔었나? 찾아보니 그때는 카롤 얀 가이다 씨네요. 아~ 또 휘몰아치는군요. 현악기 파트의 미친 연주. 최고네요. 저드 님의 지휘봉을 잡은 팔이 높이 올라갑니다. 그 지휘에 모든 파트는 일사불란하게 응답합니다. 소리의 소용돌이를 잠재우는 호른 소리. 군더더기를 찾을 수 없는 연주에 마음으로 깊이 감동합니다. 그대로 연주 실황을 음반으로 붙잡아놓고 싶은 명연주입니다.

박수는 감동에 대한 마음에서 우러난 환호의 표현입니다. 지휘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좋은 연주에 격려합니다. 호른, 오보에, 플루트, 타악기 주자가 일어설 때마다 박수는 커지면서 객석 전체로 퍼집니다. 악장들과 악수하며 좋은 연주에 자축합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흐뭇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