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 피아노협주곡 제2번 내림 나장조, 작품 83

연주 전 협연자를 기다리는 기대감에 객석은 조용합니다. 잠시 후 협연자 필리프 비앙코니 씨가 박수를 받으며 무대로 나옵니다. 박수가 잦아들고 연주전의 적막.

1악장 지나치지 않게 빠르게. 호른과 함께 피아노 연주가 시작됩니다. 호른은 시작부터 강렬한 피아노 카덴자를 불러냅니다. 현악파트의 매끄럽고 아름다운 선율이 피아노를 부릅니다. 어? 현악기 소리에 비해 피아노 소리는 조금 투박하게 들리는데요. 오늘 협주곡은 피아니스트가 곡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오케스트라가 피아노를 끌고 가는 듯합니다. 전반부 교향곡에서 보여주었던 브람스 곡의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소리들이 피아노 소리에서는 들리지 않는군요. 기존 연주의 연주 순서를 바꿔서 피아노를 뒤로 배치한 것은 피아노협주곡의 아름다움과 연주의 강렬함을 극대화 시키고자 한 것 같은데 의도에는 못 미친 연주입니다.

피아노가 투박하니 호른도 삐끗하고 오케스트라 소리도 투박해집니다. 아무래도 젊음의 연주와는 다른 어쩔 수 없는 차이가 보이는군요. 미스 터치와 투박한 음색이 전체 음악에 안 좋은 인상을 줍니다. 이게 아닌데 이런 조화가 아닌데.... 내가 잘못 들었나? 너무 예민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러면서도 찜찜함을 어쩔 수 없습니다. 곡의 긴장감은 한 음만 흐트러져도 박자가 조금만 어긋나도 균형이 무너지게 됩니다. 나이 든 관록이 여유로워 보이기보다는 힘들어 보이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면 지휘자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골을 넣을 공격수가 미드필더와 연결되지 못하고 한쪽에서 뛰어다니고 있는 모습입니다.

2악장 빠르고 정열적으로. 개인기를 통해 실력을 보여주어야 할 때입니다. 피아노는 선우예권 때와 같은 것일 텐데 음색은 다르네요. 속도를 올려야 될 때는 부드럽게 쭉 밟아줘야 하는데 엔진 소리가 울컥울컥하듯 매끄럽게 달리지 못합니다. 오케스트라는 여전히 좋은데 피아노로 넘어오면 그 깔끔함과 맑음이 흐려집니다. 꽉 조여지지 않고 두 바퀴는 덜 조여진 나사못 같은 답답함이 느껴집니다. 피아노를 덮어버리는 오케스트라 선율. 그 큰 파도 속에서도 피아노는 당당하게 뚫고 자신의 길을 가야하는데 아쉽습니다.

3악장 조금 느리게. 이송희 악장의 첼로 소리는 아름답습니다. 첼로 파트 앞에 우뚝 서서 선율을 주도합니다. 바순으로 이어진 선율을 받쳐주는 바이올린. 다시 받은 첼로 독주. 바이브레이션을 넣을 때마다 현을 짚은 손가락은 흔들리며 아름다운 선율을 뽑아냅니다. 깃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현악기 소리들은 피아노를 위해서 낮게 깔아줍니다. 오늘 피아노는 브람스와 어울리지 않는군요. 깔끔하게 깔아놓은 이불 위로 아무렇게나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대전시향이 그동안 기대치를 높여놓은 탓도 있겠지요. 한 번 맛본 최고의 연주는 기대치를 조금만 벗어나도 금방 드러나게 되니까요. 첼로 솔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소리에 매료됩니다. 손끝에서 시작된 소리는 활과 현이 맞닿으면서 기품 있는 소리로 드러납니다. 변함없는 홍수은 악장의 오보에 소리와 이송희 악장의 첼로 소리에 위안을 받습니다.

4악장 조금 빠르면서도 우아하게. 한 번도 그 맑은 소리로 곡을 주도하지 못하네요. 주인공이 자꾸 뒤로 숨는 모양새입니다. 소리는 이렇게 어울리기가 힘듭니다. 수량이 부족한 폭포처럼 낙하하며 쏟아지는 물줄기의 굵기와 떨어져 퍼지는 물방울이 영롱하게 퍼지지 못합니다. 4악장의 빠르면서도 우아하게가 드러나지 않는군요. 배경은 아름다운데 수량이 부족해서 기대했던 폭포를 보지 못한 아쉬움이 듭니다. 역시 피아노는 관록으로 치는 게 아니군요. 젊은 날의 화려함은 때론 그리운 추억처럼 회상할 때도 있는 것이겠지요. 일부러 흠을 잡거나 악평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며 소믈리에처럼 혀끝으로 살짝 맛만 보고 투정부리는 게 아닙니다. 연주를 위해 수 십 번 다양한 연주곡을 램프의 요정을 시켜 불러내서 듣고 그래서 몸과 마음에 새겨진 그 곡의 아름다움을 실황으로 느껴보려는 마음에서 드는 안타까움입니다. 단 한 번뿐인 그 순간의 아름다움의 기억. 그것은 느껴본 사람만이 찾게 되는 아름답고 행복한 중독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