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만큼 아름답고 좋은 계절이 있을까요. 불어오는 바람은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높고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은 마음을 깨끗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들 말하는데 어떤 책을 읽을까요.

“나는 이 가을에 몇 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술술 읽히는 책 말고 읽다가 자꾸만 덮어지는 그런 책을 골라 읽을 것이다. 좋은 책이란 물론 거침없이 읽히는 책이다. 그러나 진짜 양서는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 한 두 구절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주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서란 거울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한권의 책이 때로는 번쩍 내 눈을 뜨게 하고 안이해지려는 내 일상을 깨우쳐 준다.”-법정, [무소유] 중에서

법정 스님의 글을 읽으면 책을 읽고 싶어집니다. 자꾸만 덮어지는 그런 책, 생각하게 해주는 책과 글을 마음으로 느끼고 싶은 계절입니다. 그리고 책은 음악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음악을 들으러 우리는 연주회장으로 갑니다. 모차르트를 만나기 위해 가는 발걸음은 음악만큼이나 가볍고 경쾌합니다.

모차르트,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협주교향곡 내림 마장조, 작품 364

오늘 연주자 김필균 씨와 폴 뉴바우어 씨가 박수를 받으며 들어옵니다. 곧이어 지휘자 저드 님이 지휘대에 올라 음악은 시작됩니다. 그 순간! 음악이 시작되는 그 순간은 관객도 함께 숨을 죽입니다. 김필균 씨 역시 독주자로서의 연주가 빼어납니다. 모차르트 특유의 발랄한 리듬.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음악. 모차르트는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매끄러운 현악기 소리. 깔끔한 목관악기 소리. 금관악기마저도 특유의 굵은 소리를 가다듬어 가장 예쁜 소리로 바꿉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함께 연주하는 합주협주곡. 음의 조화는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듯이 바이올린이 치고 나가면 곁에서 비올라가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 안아줍니다. 소리의 높낮이와 조화를 이루며 오케스트라와 주고받습니다. 더블 카덴자는 서로 보이지 않는 검으로 겨루는 듯 하면서도 서로 받쳐주기도 하고 활은 현 위를 일렁이는 물결처럼 오르내리며 음의 정점 위에서 놉니다. 제임스 저드 님의 지휘는 섬세하고 예민하며 발랄하게 음을 뽑아내는군요.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선녀의 옷에는 바느질한 자리가 없다는 뜻으로 시문 등이 일부러 꾸민 데 없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면서 완전무결하여 흠잡을 데가 없음을 이르는 말인데 모차르트의 음악을 천의무봉이라고 할 것입니다.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클라리넷 플루트 협주곡을 들어봐도 모차르트 특유의 선율이 비슷비슷하게 들리지만 전혀 식상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2악장은 조용하고 잔잔하며 부드럽고 약간의 애수 띤 선율로 시작됩니다. 언젠가 들어본 듯한 가곡의 익숙한 멜로디처럼 들리며 마음으로 스며듭니다. 두 악기가 같은 곡조를 자신만의 음색으로 주고받으며 뿌려놓은 조용한 선율에 마음도 고요하게 가라앉습니다.

언젠가 모차르트가 작곡한 합창곡을 연습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 들어보니 곡조가 매끄러워 금방 따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이 쉬워 보였는데 막상 곡을 표현하려고 하니 그 부드러움과 매끄러움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듣기에는 너무 편하고 좋지만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연주하는 김필균 악장과 폴 뉴바우어를 보면서 부드러움과 빠름을 저렇게 자연스럽게 연주할 수 있을까 하며 감탄했습니다.

다시 되찾은 경쾌함과 발랄함으로 3악장은 시작됩니다. 한껏 치켜 올린 음의 꼬리들은 객석으로 흩어져 관객을 간지럽힙니다. 속으로 조용히 따라 부르며 하늘로 함께 오르기도 하고 지휘를 따라 흥겹게 저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또 봐도 재미있는 영화처럼,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풍경처럼, 예쁜 색깔에 취해 바라보는 꽃송이처럼 모차르트만의 아름다운 선율에 취해 들었습니다. 그렇게 아껴듣던 곡은 아쉽게도 마지막 짠 짠 짜~안 하며 모든 현악기의 활을 위로 올리며 아쉽게 끝납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다장조 작품 60, “레닌그라드”

모차르트의 음악은 큰 부담 없이 아름다운 선율에 취해 눈감고 들었다면 쇼스타코비치의 레닌그라드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을 따로 떼서 들을 수 없습니다. 음악은 시대의 아픔을 담아내기도 합니다. 1.4후퇴를 경험한 세대는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굳세어라 금순아를 흥겨운 노래로만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전국이 최루가스에 휩싸여 온 국민이 콜록거리던 80년대의 민주화 투쟁을 겪은 세대라면 최근 영화 [택시 운전사]를 팝콘을 먹으며 재미삼아 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시대의 소음]에는 살아남기 위해 음악을 놓지 못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음악, 스탈린 체제 아래 살아남기 위해 작곡을 했고 음악을 모르는 그들에게 음악으로 승리의 조롱을 담은 교향곡을 완성시켰습니다.

“그 말들이 그의 음악을 보호해주었기 때문에 그는 그대로 놔두었다. 권력층이 말을 갖게 하라. 말이 음악을 더럽힐 수는 없으니까. 음악은 말로부터 도망간다. 그것이 음악의 목적이며, 음악의 장엄함이다. -줄리언 반스, [시대의 소음] 중에서

히틀러의 군대가 소련에 들이닥쳐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그로부터 장장 18개월 동안 이어진 고립으로 레닌그라드에는 처참함과 비통함이 가득했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시대의 아픔을 음악으로 그려놓았습니다.

일명 ‘침공 에피소드’로 불리는 1악장은 전쟁의 끔찍함이 표현됩니다. 소규모의 오케스트라로 모차르트를 듣다가 무대를 꽉 채운 오케스트라가 뿜어내는 소리의 웅장함에 객석은 압도당합니다. 피콜로와 솔로 바이올린의 부드러운 멜로디 후 멀리서 아주 작게 스네어 드럼의 시작으로 점점 커지면서 거대한 음향을 만들어냅니다. 이 부분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 것은 드럼 리듬을 일관되게 끌고 가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드럼 리듬은 일정하고 정확하며 그 정교함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시계속의 작은 톱니바퀴들이 꼭 들어맞아 정확한 시간을 표시하는 것처럼 다른 악기들이 리듬에 참여하는 동안에도 계속 드럼의 리듬은 계속됩니다. 그런데 약간 박자가 밀리면서 다른 악기와의 연결이 어긋났습니다. 정확히 두드려져야할 드럼의 그 박자가 깔끔하고 일정하게 연속되지 않았습니다. 듣는 귀의 예민함. 영화 [위플래쉬]에서 폭군 지휘자 플렛처 교수가 있었다면 꽉 쥔 오른 손을 위로 올려 연주를 멈추게 하고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며 잡아먹을 듯 호통 칠 것입니다.

“네가 친 박자가 빨랐던 것 같아, 느렸던 것 같아?”

오늘 연주의 옥의 티! 드럼 소리는 타악기 소리가 아니라 다발로 쏘아대는 기관총 소리로 들립니다. 라벨의 볼레로처럼 점점 커지면서 일정한 리듬으로 객석에 쏟아지는 음의 총알들. 큰북과 팀파니 소리는 탱크와 대포의 폭음소리이며 금관악기와 심벌즈는 두렵고 끔찍한 전쟁의 소리입니다. 모든 것을 빨아들여 녹일 것 같은 거대한 음의 용광로. 금관악기들은 일제히 소리를 뿜어댑니다. 반복되는 리듬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듭니다. 공중에 터지는 북소리와 심벌즈 소리. 하늘의 공습처럼 모든 악기가 쏘아대는 소리에 몸을 앞으로 가져가 바라보며 듣습니다. 탐탐은 쇳소리를 내며 크게 울리고 팀파니는 크게 두드려 터치고 모든 현악기가 일제히 온 몸으로 토해내며 공중으로, 가장 높은 곳으로 음의 폭탄들을 쏘아 올립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듯 휴~하며 거대한 소리 폭탄 후 정적이 찾아듭니다. 플루트 후 바순소리가 피아노 소리와 함께 걸어 나옵니다. 바순 소리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걸어가는 수도승처럼 들립니다. 1악장의 주선율이 변주되면서 악장의 끝을 향해 다시 달려갑니다.

2악장. 오보에가 현악기 소리 위로 애절한 선율을 들려줍니다. 그 선율을 잉글리시 호른이 받아 이어갑니다. 현악기는 피치카토와 스타카토로 음을 끊어 연주하고 클라리넷이 갑자기 기괴한 소리로 뛰어들면서 독특한 음색으로 변합니다. 다시 빨리지는 리듬. 탬버린과 드럼소리. 우드락 소리. 각 악기가 뒤섞이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내 조용해진 객석으로 두 대의 하프가 퉁겨낸 맑은 소리가 들리고 깊고 낮은 저음의 클라리넷 소리가 멀리까지 전해집니다.

3악장. 현악기 소리. 대전시향은 원래 현악기 소리가 좋았는데 오늘따라 바이올린 파트의 현악기 소리가 정말 좋습니다. 마치 큰 배가 얼음 위를 미끄러져가는 거대하고 깔끔한 소리의 덩어리 같습니다. 최고의 투수가 던진 볼 끝이 살아있는 공처럼 소리의 깊이와 색깔이 다릅니다. 목관파트 끝에 베이스 색소폰인가 잘 보이지 않는데 독특한 소리의 실체가 궁금하게 들립니다.

곧바로 4악장으로 이어집니다. 듣는 내내 오늘 연주도 기억에 남을 연주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전히 연주에 집중하게 만드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지휘. 오늘은 무대가 멀지 않고 가깝게 느껴집니다. 소리의 실체가 하나의 덩어리로 만질 듯 느껴집니다. 다시 드럼의 두드림 소리가 심장 박동을 빠르게 만듭니다. 모든 악기는 빠르고 거대하고 웅장한 소리로 합쳐지면서 음의 회오리를 만듭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심장으로 스며든 소리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압도됩니다. 관객은 이미 완전히 사로잡힌 소리의 포로들입니다. 오늘 연주는 거대한 음의 실체를 목격한 충격입니다. 저 멀리 뿌연 흙먼지 속에서 점점 다가오는 코끼리 떼를 본 것 같은 큰 무리의 음 덩어리를 목격한 충격에 휩싸입니다. 인선희 씨가 온 몸으로 심벌즈를 가르며 터칩니다. 트럼펫, 튜바, 트럼본은 마지막 온 힘을 다해 소리를 뿜어냅니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저절로 자리에서 일어나 탄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냅니다. 기억에 남을 또 한 번의 멋진 연주입니다.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으로 인정합니다. 잘 했다고 정말 잘 했다고 그래서 흐뭇하고 행복하다고 오래도록 박수를 보냅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에서 떠돌이 소리꾼 유봉이 배고픔에 집을 떠나는 아들 동호에게 호통 치던 소리가 생각납니다.

“누님! 이젠 소리로만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여! 괜히 쓸데없는 짓 하다 골병들지 말고 관두란 말이여! 그까짓 소리하면 쌀이 나와 밥이 나와!”

“뭐여! 야 이놈아! 쌀이 나오고 밥이 나와야만 소리 하냐 이놈아! 지 소리에 귀신이 들어오면 쌀보다도 황금보다도 더 좋은 거시 소리여 이눔아!”

음악이 좋아 모여든 음악의 포로들은 연주회장을 나와 어느새 찾아온 가을밤을 흐뭇한 마음으로 걸어가며 다들 이런 마음이었을 겁니다. 좋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