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중 금빛 은행나무는 가을을 더욱 환하게 만듭니다. 곽재구 시인의 [은행나무]를 떠올리며 세상을 온통 노랗게 수놓은 가을빛을 받으며 음악회로 가는 길은 행복하기만 합니다.

“너의 노오란 우산깃 아래 서 있으면 아름다움이 세상을 덮으리라던 늙은 러시아 문호의 눈망울이 생각난다.”

 연주전부터 이미 음악을 가슴 속에 품고 온 사람들에 의해 아트홀은 술렁거립니다. 이 행복한 기다림. 자리에 앉아 무대를 보니 관현악단 배치가 달라졌네요. 새로운 배치가 어떤 소리를 들려줄지 기대됩니다. 새로운 지휘자 제임스 저드는 말러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어 오늘 말러 연주가 더욱 기대됩니다. 꽃의 악장 블루미네를 듣는 즐거움. 주제곡조를 연주하는 트럼펫 소리는 기존의 선언하듯 찌르는 소리가 아닌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소리입니다. 언제 들어도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리. 색색의 아름다운 꽃잎처럼 음악은 예쁘게 피어납니다. 오보에 소리는 빠알간 꽃 같고, 첼로 소리는 넓은 잎의 포근함으로 들리고 더블베이스에 얹힌 오보에 소리는 지저귀는 새소리처럼 들립니다. 가끔씩 퉁기는 하프는 노란 꽃잎이고 합주는 화려한 꽃들의 만개처럼 들립니다. 곡 전체에 돋보이는 트럼펫 소리는 꽃밭 가운데 핀 아름다운 장미입니다. 말러 특유의 곡조는 꽃이 되어 가슴으로 파고듭니다. 아~ 정말 아름답다는 말밖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아쉽게 끝난 연주에 단원들도 발을 구르며 아름다운 음악을 자축합니다.

엘가 첼로협주곡. 2011년 3월 18일 지진경 씨의 협연으로 들었던 곡인데 늦가을 황혼 같은 적막함과 쓸쓸함을 보여주는 음악으로 엘가 첼로 협주곡은 자클린 뒤프레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이렇게 모든 협연의 기대감은 시작 전의 궁금함으로 두근거립니다. 양성원 씨. 그 이름만으로도 곡에 대한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합니다. 포스, 아우라 이런 말로 현장의 실체를 느낍니다. 시작 전 객석에서 울린 휴대전화 소리는 차라리 시작 전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용해진 공간으로 그어낸 소리는 오직 첼로 소리만이 객석을 꽉 쥐고 숨도 조심스럽게 쉬게 만듭니다. 몸으로 소리를 만들어 바이올린 파트로 넘겨주는 것 같이 자연스러운 연결에 듣는 몸도 앞으로 다가갑니다. 첫 악장의 가장 멋진 최고음을 뽑아내는 소리의 감동. 기대했던 소리와 곡의 전개에 푹 빠져들게 합니다. 현 위에서 미끄러지고 잡아채는 활이 만들어낸 첼로 소리는 울림통을 통과해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풍성하게, 맑게 찌르며 가슴으로 파고듭니다. 지판 가장 끝까지 짚어가며 올라가는 첼로 음은 최고조에 이르러 합주됩니다. 독주자의 숨소리도 퉁긴 첼로 소리와 함께 가까이 들리며 1악장을 맺습니다.

2악장. 수많은 연주의 관록이 묻어나는 몸짓과 소리는 안정감으로 믿음을 주며 소리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관현악단과 함께 어우러진 일체감은 자연스럽고 색색의 실들이 어울려 전체 그림을 완성하듯 잘 짜여진 소리의 조화가 멋집니다. 빠름과 빠름의 조화, 퉁김은 빠름을 맺는 마침표.

3악장 아다지오.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곡조에 빠져듭니다. 음은 가장 깊은 곳에서 뽑아 올리듯, 끌어올리듯, 온몸으로 잡아당기듯 심연의 소리는 음이되어 처연하게 흐느낍니다. 감상한다는 말보다는 흡수된다고 해야 할 겁니다. 소리가 마음을 적십니다. 쉬지 않고 넘어간 4악장. 참아온 빠르기는 잠시 더 깊은 첼로소리에 압도됩니다. 긁어 올린 소리는 객석을 숨죽이게 하고 합주되며 퍼지고 커진 소리가 겨우 참았던 숨을 쉬게 합니다. 소리는 유기체처럼 살아서 서로서로 연결되어 움직입니다. 일렁이고 솟아오르고 튀어 오르고 반짝이며 하나의 커다란 소리의 덩어리를 만듭니다. 온전히 음악만이 존재하는 공간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소리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아름다운 결박에 꼼짝하지 못하는 즐거움을 조용히 숨죽이며 누리는 기분! 끝을 향하여 처음 주제음이 다시 등장합니다. 아름다움과 멋진 연주는 환호성으로 바뀌고 박수 소리는 홀에 차고 넘칩니다. 연주 후의 양성원 씨는 더 멋지네요. 아름다운 연주로 감동을 선사한 멋진 모습. 지휘자 님의 강권으로 아쉬움을 달래주는 앵콜곡이 연주됩니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 중 ‘사라방드’. 모두가, 정말 모두가 오직 첼로 소리 하나에 사로잡힌 시간. 무반주 첼로 소리에 미동도 할 수 없는 절대 고요의 순간에 한줄기 빛처럼 첼로 음은 허공으로 날아오릅니다. 잘 차려진 음식을 배부르게 먹은 후 맛보는 후식의 별미랄까 아름다운 연주에 대한 답례는 그저 환호와 박수 뿐 입니다.

말러 교향곡 1번 ‘거인’. 2013년 11월 22일에 연주했던 곡으로 얼마 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 씨가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기교와 힘. 신들린 연주. 바이올린 한 대로 모두를 꼼짝 못하게 사로잡았던 연주를 이제는 들을 수 없다는 생각에 안타깝고 슬픈 생각이 듭니다.

한번 사랑에 빠지면 자꾸 보고 싶듯이 처음 말러에 빠져 듣고 또 듣던 때가 생각납니다. 더 아름답고 흐뭇한 건 그렇게들은 음악은 시간이 지났어도 처음 그 느낌으로 퇴색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말러를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기대하게 했던 것에서 이제는 그 곡 자체를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요.

1악장. 열어 논 출입문은 무대 밖의 소리를 예감케 합니다. 느리고 조용한 소리의 긴장감. 절제된 소리는 조용히 깔리고 아침 햇살처럼 트럼펫 소리는 빛납니다. 호른 소리는 아침 안개처럼 은은하고 클라리넷의 뻐꾹 소리. 첼로 파트와 바이올린, 트럼펫 소리는 깨어난 숲의 생동감을 드러냅니다. “금(金)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開闢)을 한다.” 박남수 시인의 [아침 이미지]가 생각납니다. 고요한 아침을 수놓은 잔잔한 소리들. 곱게 채색한 수채화처럼 맑고 깨끗한 소리들이 한데 어울려 생동감을 줍니다. 플루트 소리로 다시 뻐꾹 소리와 어울리고 미끄러지듯 울리는 첼로 소리와 아주 낮게 깔리는 베이스 소리. 조용히 우르릉거리는 팀파니. 맑은 구슬을 가득 가슴 속에 품고 터뜨리기 직전의 긴장감처럼 이어지는 뻐꾹 소리들. 1악장은 그렇게 조용히 속삭이는 사랑의 소리를 가까이 다가가 듣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우고 조용함이 간질이는 간지러움을 음미합니다. 얼마나 참았나요.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하던 조용함이 터지며 소리는 폭발합니다. 어느새 떠오른 뜨거운 태양처럼 뜨거운 소리의 덩어리. 호른이 내지르는 외침. 큰 소리 속에 들리는 트라이앵글의 맑은 소리.

2악장. 힘찬 움직임이 느껴지는 첼로 소리. 참아온 현악기들이 일제히 소리를 냅니다. 다양한 매력을 지닌 사랑하는 사람처럼 박력있는 리듬감이 객석을 압도합니다. 모든 파트가 각각의 악기 특성을 하나의 리듬으로 표현합니다. 활은 켜는 것이 아니라 두드리기도 합니다. 호른 소리의 매력적인 울림과 춤곡처럼 둥실둥실 떠오르는 현악기 소리. 여인의 날씬한 허리처럼 현악기는 매끄럽습니다. 잡으려해도 잡히지 않는 아름다운 발걸음처럼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납니다. 다시 2악장 주제 선율이 총주로 점점 높이 솟아오르며 커집니다. 그후 단호한 맺음. 시원합니다.

3악장. 팀파니의 둥둥 소리와 베이스 독주. 언제 저런 소리를 감춰두었을까 싶게 당당한 베이스 솔로 소리. 오보에 소리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지만 간드러지는 소리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그런 소리로 전면에 나섭니다. 3악장의 부드러운 춤곡풍의 경쾌한 리듬에 바이올린은 잘 갖춰 옷을 입고 미끄러져 들어옵니다. 선이 살아있는 소리. 각자의 멋을 소리로 드러냅니다. 하프 소리를 듣는 것은 말러 곡의 묘미죠. 가끔씩 신비로운 향료처럼 곱게 뿌려져 맛을 더해줍니다. 비오기 전의 낮은 구름처럼 소리는 낮게 깔리고 언뜻언뜻 바이올린과 트럼펫 소리가 빛나고 여기저기서 생기를 얻은 타악기 소리들. 씩 웃는 얼굴 같은 싱겁고 점잖은 바순소리. 고요한 심벌즈 소리는 4악장을 예고합니다. 그렇게 가슴 터지듯 소리들은 일제히 객석으로 쏟아집니다. 폭풍 같은 소리의 회오리. 소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두근거리는 가슴은 마구 뜁니다.

4악장을 기다린 기대감은 일제히 터뜨린 소리로 해소됩니다. 최고조에서만 날 수 있는 소리의 집합체를 커다란 덩어리로 소리의 실체를 마주합니다. 한차례의 태풍 뒤에 찾아온 고요함. 현악기는 온몸으로 빛을 노래하고 불어오는 바람처럼 바이올린 소리는 정상에서 맞는 바람처럼 상쾌합니다. 다시 한 번 터질 화산은 기어코 뜨거운 소리의 덩어리들로 변한 불을 뿜습니다. 번쩍 쳐들은 목관악기들은 온몸으로 가장 큰 소리들을 토해내고 서스펜스를 느끼게 하는 현악기의 날카로움. 심벌즈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금빛 소리를 객석으로 던집니다. 선언하듯 호른들은 외치고 질세라 트럼펫이 가세합니다. 언제 4악장까지 왔는지 느낄 겨를도 없이 재미있는 영화가 금새 끝나듯 끝을 향해가는 것이 너무 아쉬워 한 음 한 음 아껴 듣습니다. 또다시 찾아온 고요함 위로 뻐꾹 소리. 퉁퉁 하프 소리. 마지막 춤을 추듯 미끄러지는 바이올린 소리. 독무처럼 오보에 소리가 플로어에 서있고 그러다 대미를 장식하는 소리들이 비올라 소리로 단호하게 긋습니다. 너무 좋은데 끝을 아는 아쉬움이 벌써 마음을 붙잡습니다. 모든 악기가 일제히 소리를 내지만 탁하지 않은 최고조의 음들이 터집니다. 반복되는 마지막 주제음. 호른은 일제히 일어나 외칩니다. 타악기는 터지고 두드리고 부딪치고. 큰 소리의 감격은 이런 것입니다. 잘 갖춰진 큰 소리의 매력. 이게 말러죠. 그래서 말러를 듣고 싶어 하고 흥분하게 합니다.

멋진 거인을 만났습니다. 덩치만 큰 거인이 아니라 바라보기만 해도 멋진 거인을 만났습니다. 참 잘 하네요. 소리 높여 브라보를 외칩니다. 성능 좋은 대형 세단을 탄 느낌입니다. 차가 가지고 있는 첨단 기능들을 능숙하게 사용해 달리듯이 지휘자 님은 완벽한 거인을 보여주셨습니다. 다음 연주와 2017년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