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무대에서 청중 기립 박수
유럽 최고의 음악 강국인 체코, 헝가리, 비엔나, 뮌헨. 이 무대에서 대전시립교향악단이 성공적인 공연을 마무리하면서 향후 유럽 무대에 한국 오케스트라가 진출할 수 있는 새 지평을 열었다. 지난 12월 5일부터 18일까지 모두 4회의 콘서트를 가짐으로서 지금까지 유학을 통해서 배워왔던 음악을 본고장의 최고 무대에서 보여주어 우리 클래식의 자긍심과 자신감을 획득했다.
무엇보다 이번 콘서트가 그간의 관행이었던 교민음악회가 아니라 95% 이상이 현지 관객이었고 그것도 티켓 마케팅을 통해 이뤄진 점에서 정통 클래식 무대의 도전이란 초유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이를 위해 현지의 쉔부른 클래식 매니지먼트(대표: 권순덕)가 협력적 관계를 통해 프로젝트의 완성도를 끌어 올린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꿈의 무대로 불리는 무지크 페어라인 골든홀(14일)에서 단원과 지휘자는 약간 긴장했지만 결과는 극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청중 전원의 기립 박수를 받은 감격의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휘를 마친 금노상 지휘자의 소감이자 눈시울이 뜨거워진 단원들 역시 감동의 순간이었다.
이 날 메인프로그램인 김규태의 아리랑 환상곡도 교민들은 가슴이 울컥했다는 반응이었고 최나경의 모차르트 협주곡과 앙코르가 청중을 몰입시켜 한층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마지막 곡 인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에서 거듭 되는 앙코르에 슬라브 무곡, 이어 이곳 비엔나 신년음악회의 특허품인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하자 청중들은 허가 찔렸다는 듯 가벼운 폭소와 함께 환호하면서 리듬 박수로 응답했다.
자신의 나라 곡을 외국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것에 감동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이는 4번의 연주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특징이었다. 체코 국민들의 예술적 자존심과 독립의지가 서린 스메타나홀(8일)에서 드보르작 작품으로만 연주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신세계 교향곡, 슬라브 무곡으로 이어지면서 이들은 음악을 평가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마음껏 즐기면서 동양의 코리아 오케스트라가 자신들의 곡을 성실하게 연주하는 것에 감사한 표정이 역력했다.
이는 헝가리의 이탈리안문화홀(11일)에서 여미혜의 첼로협주곡이 풍부한 감성의 선율로 이어질 때도 그랬다. 마지막 연주장인 뮌헨의 헤라클레스홀(16일)은 이 지역의 바바리안방송교향악단이 주 무대로 쓰는 곳으로 음향이 매우 좋았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탐미의 절정 선사
백건우 피아니스트의 드보르작 피아노 협주곡은 두 번 있었는데 스메타나홀의 첫 번째 연주는 時差(시차) 등 홀에 익숙하지 않아 좀 산만했지만 두 번째 연주는 청중을 眈美(탐미)의 절정으로 안내했다. 차이코프스키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레퍼토리이지만 전편에 흐르는 소박하면서도 보석처럼 매력적인 곡을 새롭게 발굴해 소개함으로써 신선함을 주었다. 자신이 보유한 레퍼토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좋은 작품을 발굴하고 정진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예술가의 겸허함을 느꼈다.
무대가 계속되면서 단원들의 앙상블도 눈에 띄게 달라졌고 금노상 지휘자도 더욱 탄력을 받았다. 최고의 극장무대에 섰다는 자긍심 , 최고의 음향, 최고의 관객 그리고 아름다운 시설, 명품극장이 주는 모든 것에서 단원들은 그야말로 일생의 소중한 체험을 쌓았다.
그러니까 오케스트라가 지휘자 한 사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음악과 예술행정, 매니지먼트의 긴밀한 관계에서 발전하고 육성되는 것임을 인식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백번 말하는 것 보다 한 번의 체험이 그래서 더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누구도 하지 못했던 未踏(미답)의 새 길을 오래전부터 장기 프로젝트로 결정한 염홍철 시장의 문화마인드, 뛰어난 행정력과 오케스트라 후원회의 노력들이 합심하여 얻어진 결실이다.
대전시향 한국 오케스트라 견인 역할 기대
때문에 대전시향이 향후 한국 오케스트라의 견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티켓이 회원제에 의해 전석 매진되는가 하면, 단원협의회로 모든 의사 결정을 하는 등 합리적인 오케스트라 운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듬뿍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이 커서도 넉넉한 사랑을 베풀 수 있듯이 ‘최고’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어찌 ‘명품’을 만들 수 있겠는가.
배가 고프면 형편에 따라 값싼 음식을 먹을 수는 있지만 한번 높아진 귀는 쉽사리 흥정이 어렵다. 그래서 우리 공연의 수준을 높이려면 무엇보다 시민의 안목을 키우고 행복지수를 높여야 하는데 멋진 예술을 만들려면 우선 예술을 만드는 사람부터 높아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도 한국의 대부분의 오케스트라들은 노조가 오케스트라를 지켜주고 발전시켜 준다고 굳게 믿는 것 같다. 예술이 고작 노동 수준의 규정을 쫒는다면 최고의 가치와 효율성을 확보할 수 있을런지 의문이 간다.
아무튼 오케스트라는 세상에서 가장 예민하고 그래서 관리 운영이 까다로운 인간 악기의 집합체다. 다행히 대전시향은 전통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이곳을 14일간 투어 연주하며 유유히 흐르는 몰다우강과 다뉴브강가를 거닐었고, 중세의 고풍스러움에 흠뻑 젖으며 그 무게감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비록 경제는 어렵지만 흔들리지 않는 국민의 저력이 예술에 있음을 확인했다.
단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런 만족감이 오케스트라의 생명인 ‘융합 사운드’에 고스란히 녹아들 것이다. 물론 그 최종 수혜자는 시민일 것이다. 꿈의 연주는 끝났지만 환청처럼 들릴 金髮(금발)의 원숙한 유럽 청중들의 환호, 황금으로 장식된 무대, 이런 경험들이 쌓여 오케스트라의 전통을 만들어 간다면 국제무대에서 한국 오케스트라가 당당히 대접 받는 때가 오지 않겠는가. 최고의 경험이 최고를 만드는 지름길임을 이번 유럽 투어가 말해준 것 같다.
탁계석(예술비평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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